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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실버 커뮤니티,
멋진 선배시민의 삶과 예술이 꽃 피는 곳

글.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구민정 교수

은빛 머리는 나이든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나이든 사람들은 노인(老人)이나 노년(老年)보다 시니어(Senior) 혹은 실버(Silver)로 불리기를 바란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세월과 함께 나이 들어간다. 이것은 숙명이다. 그럼에도 젊음과 생산성의 이미지를 더 선호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지향은 노인이라는 말에 대해 정서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실버나 시니어라는 말은 노인이나 노년이 주는 부정적 느낌을 조금은 순화하는 감이 있다.
어느 사회든 실버의 문화는 그 사회의 나침반이며 자산이다. 왜냐하면 실버 세대는 젊은이들이 마주하게 될 미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실버들이 꼰대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외견 상 멋진 은빛 머리카락뿐만 아니라, 시간의 소멸이라는 인간 본연의 두려움 앞에서도 의연한 지혜의 서사를 들려주기를 기대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쇠락을 연상케 하니 힘 빠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지만, 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활동적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혼자가 아니라 동아리(커뮤니티)를 결성하여 지속적으로 뭔가 재미난 일들을 도모하기에 이들을 바라보면 미소가 돈다. 이 정도 즐거움과 활력이라면 생애 전환, 나이듦이 젊을 때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문화 향유’라는 측면에서 어쩌면 반가울 수도 있겠다.

50+인생학교… 계급장 떼고 현재의 모습 존중

이러한 실버들의 공통점은 사람과 현재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서울의 50+인생학교와 그 이후 결성된 커뮤니티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서울의 50+인생학교는 생애 전환을 위해 몇 가지 실천규칙을 제시한다. ‘민증(나이)과 명함(전직)을 까지 말라’는 것이 그 중 하나다. 나이 들면 위 아래로 10살은 친구 먹는다는 말이 있다. 인생학교에서는 50+라는 명칭이 의미하듯 (+)숫자의 유연함대로 위아래 모두를 친구로 포용한다. 나이대로 순서를 매기지 않으니 수행할 일이 생기면 모두 골고루 나누어 하게 된다. 그리고 전직을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해 자신의 과거를 계급장처럼 달고 오지 않는다. 이렇게 현재의 모습을 중시하는 문화는 모두가 수식어를 뺀 한 사람의 실존 그 자체로 서로를 존중하게 한다.
인생학교 교육과정에는 자치회 구성 시간이 있다. 자치회가 생기면 인생학교 졸업 후에도 지속적인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서울 50+인생학교는 2022년 11월 현재 총 22기째 이어지고 있고, 각 기수의 자치회와 이를 총망라하는 총동문회가 있다. 회원의 수만도 800명 가까이 된다. 여기서 파생된 커뮤니티 수는 40개가 넘는다. 이들은 최종학력을 ‘인생학교’라고 말할 정도로 자부심과 연대의식을 느낀다. 어떤 졸업생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 그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대학을 못 갔다고 한다. 대학생이 되어 학교를 다니는 동년배들을 무척 부러워했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인생학교에 와서 좋았던 점을 이렇게 말한다. “인생학교에 오니 훌륭한 친구가 많이 생기고 재밌게 배울 수 있어서 너무 좋고 행복합니다. 대학생이 된 것 같아요”라고. 프로젝트 방식의 토론 수업과 예술표현, 자치회, 커뮤니티의 자율적 활동 등이 가져온 50+의 사회적 정체성 찾기가 그 행복감의 근원이 된 것 같다.
서울에서 전형이 창출된 50+인생학교는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어 지역마다 특색을 갖춘 인생학교들이 속속 만들어지고 있다. 광주의 ‘빛고을 인생학교’, 안성의 ‘안성맞춤 인생학교’가 그 예다. 이보다 앞서 부평, 전주, 부산, 춘천 등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형태의 인생 학교가 파생되어 이어지고 있다. 2022년 8월에 1기를 배출한 안성맞춤 인생학교는 그 졸업생들의 우애와 사회적 공헌 활동으로 실버문화의 모범 사례가 되고 있다. 그들은 인생학교 교육과정 중에도 어려운 이웃을 인생학교에 참여하도록 돕는 등 흐뭇한 우정을 보여 강의를 하는 나에게 오히려 큰 감동과 배움을 선사해 주었다.
광주 인생학교는 서울 50+인생학교 총동문회에서 만든 사회적 협동조합 ‘오플쿱’이 맡아 진행하고 있다. 춘천에서는 ‘낭만 오벤져스’라 하여 그 지역 실버세대 가운데 문화예술 활동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교육 과정이다. 춘천 지역의 실버문화가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할지 이분들에게 달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건강, 문화, 예술 등 다양한 커뮤니티 형성… 사회에 선한 영향력 전파

실버세대는 어떤 문화예술, 커뮤니티 활동을 원할까?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 인생학교 졸업 후 주로 커뮤니티 단위로 지속적인 활동이 이루어지기에 그 커뮤니티들의 현재와 미래, 그리고 마음속 깊은 갈망을 알아보고 싶어 조금 찾아보았다.
서울 50+캠퍼스에는 195개의 커뮤니티가 있고, 그 가운데 50+인생학교 졸업생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는 40개 남짓하다. 장르는 음악, 미술, 연극, 건강 걷기, 답사 등 예술과 체육, 글쓰기 등으로 갖가지 활동을 망라하고 있다. 이 커뮤니티들은 대체로 초기에는 가벼운 주제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부의 팀워크를 다지는 시기를 보낸다. 그 후 커뮤니티별로 차이는 있지만 대개 사회공헌을 모색하고,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나아가는 흐름인 것 같다. 일례로 2018년 6월에 생긴 낭독극 커뮤니티 ‘막독극’은 월 2회 격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모인다. 이들은 낭독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연 관람, 낭독 오디오북을 만들기도 한다. 낭독 오디오 내레이터 활동으로 각종 지원 사업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코로나19 시기라 모이기도 어려웠던 시기에 난국을 정면으로 뚫고 나가는 이들의 활동은 매우 고무적이다. 우선 서로 좋아서 자주 만났던 것이 이 커뮤니티의 발전 비결이라고 한다. 실버세대 커뮤니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조직을 만드는 힘을 갖추고 있다. 그리고 오래도록 함께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과 헌신을 아끼지 않는다.
서울 50+인생학교 출신들로 이루어진 커뮤니티 중에는 특이한 이름들이 많다. 재미있는 이름만큼 활동도 창의적이고 유쾌하다. ‘막독극(막걸리 마시고 낭독극하기)’, ‘날꽃밴드(날아가 꽃중년 밴드)’가 있고, 이 두 커뮤니티가 함께 결합해서 음악과 낭독극을 결합해 새로운 단체를 성립한 ‘공갈단(공연을 갈망하는 단체)’도 예로 들 수 있다. 또 사회적 협동조합 ‘오플쿱’은 학습 공동체 ‘오도독’을 계기로 결성된 것이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두두 협동조합’이다. 두두 협동조합은 2017년 서울 50+인생학교 졸업과 동시에 커뮤니티를 시작하여 사회적 협동조합으로 발전시킨 케이스다. 한동안 커뮤니티에서 탐구해온 사회적 경제의 지식과 의미를 적용하여 ‘탐방으로 찾아가는 사회적 경제 초읽기’라는 주제로 50+ 대상 강좌를 개설하는 등 멋진 선례를 남기고 있다. 이들에게는 3톡의 규칙이 있다. ‘책톡(사회적 경제 이해를 위해 책 세 권 읽고 토론하기), 듣톡(읽고 이해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를 초청해서 듣기), 감톡(현장을 방문해 몸으로 느끼기)’이 그것이다. 두두도 처음에는 즐겁게 놀며 친구간의 우정을 쌓다가 점차 사회 공헌과 선한 영향력 행사를 위해 협동조합으로 전환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단체다.

지속가능한 커뮤니티의 조건은 ‘참여’와 ‘평등’

이처럼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보이고 있는 실버세대의 커뮤니티들에게는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뭔가 다른 비결이 있을 것 같았다. 커뮤니티를 이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비결을 알려 달라 하니 한 마디로, “규칙을 세우고 지켜야 합니다”라고 답한다. 실버세대 커뮤니티들의 규칙은 어떤 것이 있을까? 서울 50+인생학교 이후 결성된 몇몇 커뮤니티들의 규칙을 소개해본다.
▲ 한 사람이 대화를 독점하지 않는다. ▲ 뒤풀이 비용은 1/n(만원의 행복)을 원칙으로 한다.(단, 자발적으로 쏜다고 하면 말리지는 말고 격하게 박수친다. ^^) ▲ 커뮤니티 활동에 대한 최대 기여는 ‘참석’과 ‘참여’다. 매년 송년회 때 정모 최대 참석자를 우수 회원으로 선정 시상한다.(상품 : 커피쿠폰) ▲ 회장과 총무는 봉사정신을 갖고 솔선수범한다. ▲ 총무는 제반 행정실무를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가급적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고 문서작업이 가능한 사람이 맡는다. ▲ 커뮤니티의 다양한 행사와 모임에 회원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고르게 역할을 맡는다.(예 : 낭독 윤독자료 번갈아 준비) ▲ 번개 모임 등 친목을 도모하는 자리를 수시로 갖는다.(예 : 낭독극 공연, 단체관극) ▲ 50+재단과 캠퍼스의 커뮤니티 관련 행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커뮤니티의 위상과 지명도를 높여 회원들이 커뮤니티 활동에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도록 한다.

스스로 낮춰 조연(助演)됨으로써 즐거움 찾아

실버들이 커뮤니티 활동에서 제일 바라는 것은 즐거움이다. 나이 들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고립감이라는데 그 고립과 고독 대신 우정과 연대감을 원한다. 이러한 정서적 행복감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첫째가 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들을 수 있는 자세’라고 답한다. 조화롭게 함께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조연의 위치에 서고, 타인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버세대는 대부분 어떤 조직에서 지휘를 해온 경력자들이다. 가정주부로만 살아왔다 해도 살림살이로는 9단이다. 그래서 실버세대는 조연이 되어 뒤에서 보조해 주는 역할이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주연이 되려 한다. 그러나 이제는 아름다운 조화를 위해 주연되기를 자제하고 조연으로서 느긋하게 숨을 고르는 연습이 필요한 것 같다.
조연되기는 실버세대가 지혜로운 서사를 지닌 선배시민으로서 그 삶의 모습과 이야기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자산이 되어주는 길이다. 실버세대의 커뮤니티는 힘 있는 조연의 역할을 연습하는 공간이다. 이렇게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으로 즐거움을 찾다 보면 지혜로운 서사는 자연스레 봉사 활동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효능감이 주는 보람이 즐거움 중에서도 가장 큰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거리에 화단을 만들어주는 커뮤니티 ‘드림 가드닝’은 곳곳에 꽃을 심어주는 활동으로 봉사한다. 안성의 ‘화초사랑’은 예쁘게 화분을 만들어 배달 활동을 하는 커뮤니티이며, 서울 50+ 북부 캠퍼스에는 부모 없는 청소년과 멘토 – 멘티 관계를 맺고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 지켜봐주는 커뮤니티도 있다. 서울 50+ 남부 캠퍼스에서 올가을 새로 결성된 커뮤니티는 ‘힐링극단, 카스테라’이다. 이들은 ‘50+연극과 예술로 소통역량 기르기’라는 강좌 이후 관객과 소통하는 연극의 매력을 느끼고 이 활동을 이어가고자 만들었다. 이들은 관객의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즉흥극으로 표현하는 ‘플레이 백(Play back)’ 공연의 형식으로 수업 마무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 관객으로 참여했던 청년의 이야기를 즉흥으로 표현하였다. 진심으로 표현하는 즉흥연기가 너무도 멋졌다. 청년과 실버가 함께 공감하며 눈물로 서로의 마음에 위로와 힘을 주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였다. 세대를 잇는 이 감동을 오래 간직하고자 그 의미를 커뮤니티 활동으로 이어가길 희망했다. 이들은 올겨울이 가기 전 커뮤니티의 첫 행사로 ‘리어왕 이야기’로 워크숍을 계획하고 있다. 이들의 활동은 예술이란 삶과 유리되지 않는 시선에서 비롯된 열정임을 깨닫게 한다. 이들이 하는 연극은 다름 아닌 지혜의 서사, 선배시민의 따스한 시선을 실천하는 몸의 언어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멋진 노후의 삶을 꿈꾼다. 종종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면 귀촌을 한 노부부가 고즈넉한 전원주택을 짓고 느긋하게 사는 모습이 나온다. 참 멋있지만 어쩐지 나와는 거리가 먼 꿈 같은 이야기 같다. 도시의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라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 좋아하는 친구들과 예술을 향유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나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끔은 가까운 극장 무대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연극을 하는, 일상의 예술이 ‘멋’으로 쌓여 만들어지는 실버의 삶을 꿈꾼다. 그런데 그 삶은 이제 꿈이 아니라 곳곳에서 피어나는 현재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있다. 실버의 현재가 우리 사회의 미래, 나침반이 되어 가기를 바란다. ‘힐링극단, 카스테라’처럼.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구민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