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1장

인문

아름다움의 충만,
명장면 명대사가 주는 힘

글. 김중기 영화평론가

영화 속 명대사는 늘 시대를 넘어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그 속에는 지극한 사랑이 있고, 삶의 위로가 되는 뜻이 있으며 또 용기를 주기도 한다.

“사랑은 절대 미안하단 말을 하지 않는 거야”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
러브 스토리(1970)

헤어질 결심

사랑이란 참으로 미묘하면서도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것이다. 또 고백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느껴지는 둘 사이의 감응이다. 그래서 가까운 사이라도 타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러브 스토리’에서 제니의 말은 무슨 뜻일까. “앞으로 미안한 짓 하지 말라.”는 뜻일까. 물론 표면적인 뜻일 수 있다. “미안해!”라는 감정은 다분히 세상의 이치에 따른 것이다. 사랑은 그 너머에 있다. 둘만의 특별한 공간, 둘만의 시간에서 감응하는 것이다.
‘사랑’과 ‘미안’은 한 공간에 있을 수 없는 감정이다. 그래서 제니의 말은 둘만의 세계, 사랑의 정수(精髓)를 붙잡으려는 마음이 아닐까.
이처럼 추억의 명화에 켜켜이 쌓인 관객의 세월 또한 더하니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달서아트센터에서 ‘영화 속 명장면 명대사를 찾아서’ 강좌를 2년째 열고 있다.
다시 보고픈 영화의 명장면과 함께 그 명대사의 의미를 다시 읽어내는 시간이다.
올해부터는 고전뿐 아니라 신작 영화도 추가했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1)이나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2021)처럼 단순히 보는 수준을 넘어 영화들의 장면과 대사를 통해 영화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 웨이)는 “나는 당신의 미결사건이 되고 싶어요.”라고 말하고 바다 깊숙이 비밀을 묻기 위해 모래를 파헤친다. 그녀는 해준(박해일)에게 단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해준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도 둘은 지극한 연모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미결’이 되고자 하는 필사적인 몸짓은 그 어떤 사랑도 도달하지 못하는 극지점을 선사한다.

아메리칸 뷰티(2000)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아메리칸 뷰티(2000)

많은 명장면 중에서 특히 필자를 매혹시킨 것이 ‘아메리칸 뷰티’(1999)의 비닐봉지 장면이다. ‘아메리칸 뷰티’는 미국 중산층의 몰락과 비애를 역설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려낸 걸작이다. 이성복 시인의 시 ‘그날’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 시구처럼 ‘아메리칸 뷰티’의 가족은 모두 병이 들었다. 40대 가장은 벼랑 끝에 내몰린다. 아내는 바람이 나고, 딸 제인은 “누가 아빠를 죽여줬으면 좋겠다”며 자신을 증오한다. 회사도 사악한 인간들이 득실댄다. 새파란 젊은 매니저가 호시탐탐 그를 해고하려고 한다.
옆에 살고 있는 예비역 대령의 집은 더욱 병적이다.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위세에 눌려 아들 릭키는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았고, 아내 또한 삶의 끈을 놓은 듯 망연자실해 있다. 릭키는 캠코더의 뷰파인더로 세상을 바라본다. 어느 날 제인을 초대해 자신이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는 비닐봉지다. 바짝 마른 낙엽 위를 무심하게 떠다닌다. 바닥에 앉으려다 다시 바람에 일어서고,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다.

“그날은 마치 첫눈이 내릴 듯했어. 공중엔 자력이 넘실댔고 춤추는 소리가 들렸어. 저 봉지는 나랑 춤을 추고 있었어. 같이 놀자 떼쓰는 아이처럼. 무려 15분이나 그랬어. 그날 난 느꼈어.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신비롭도록 자비로운 힘을. 내게 두려울 것이 없다는 걸 깨우쳐 줬지.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 이 세상에는 말이야. 그걸 느끼면 견디기 힘들어. 내 마음이 미어질 것 같거든.”
비닐봉지 비디오 영상은 ‘아메리칸 뷰티’가 진정으로 보여주고 하는 주제이며 명장면이다. 무심한 비닐봉지의 움직임에서 지구 위에 드리워진 위대한 자장(磁場)까지 느끼게 한다. 심미적 관점만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 평범한 나의 하루를 남은 위대한 날들의 첫날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오늘은 당신의 남은 인생의 첫 번째 날”
Today is the first day of the rest of your life
이라는 이 영화의 명대사와 잘 어우러지는 명장면이다.

명대사 중에는 ‘굿 윌 헌팅’(1997)의 “그건 네 잘못이 아냐(It’s not your fault)”가 특히 위로가 되는 대사다. 이 영화는 상처투성이의 한 청년이 자신을 이해해 주는 멘토를 만나 내면의 아픔을 치유하는 영화다.
윌(맷 데이먼)은 폭력과 절도를 일삼지만 두뇌는 천재인 청년이다. 심리학 교수 숀(로빈 윌리엄스)은 윌이 어릴 적 큰 상처를 입었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현란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라 간파한다. 그에게 윌은 아직 어린아이다. 윌의 지식은 모두 책에서 읽은 것이다. 경험이 없으니, 그 가치도 잘 모른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없고, 사랑을 어떻게 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남이 먼저 떠날까 두려워 먼저 떠나가게 만든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스카일라(미니 드라이버)도 그렇게 떠나보낸다.

굿 윌 헌팅(1997)

It’s not your fault
굿 윌 헌팅(1997)

흐르는 강물처럼(1992)

흐르는 강물처럼(1992)

숀은 윌에게 “너도 완벽하지 않고, 네가 만났던 여자애도 완벽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서로에게 얼마나 완벽한가라는 거야.”라고 조언해 준다. 완벽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해지려고 노력하는 정도가 바로 사랑이다.
상담이 끝나갈 무렵 윌은 마침내 어릴 적 학대받은 사실을 얘기한다. 숀은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이 “그건 네 잘못이 아냐”라고 말한다. 윌은 심드렁하게 “알아요”라고 답한다. 숀은 그에게 다가서며 다시 한번 더 “그건 네 잘못이 아냐”라고 한다.
숀은 모두 10번에 걸쳐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다. 두세 번 거듭되자 윌은 그제야 숀의 마음을 알아듣는다. 그리고 분노한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처음으로 눈물을 터뜨리며 숀과 포옹한다. 네 잘못이 아니라는 말의 진정함을 이해하고 자신과 화해하는 순간이다. 영화는 윌이 스카일라를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웅크린 청년이 드디어 길을 나서게 된 것이다. “네 잘못이 아냐”라는 대사는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 다가서는 사랑의 언어다.
이번 6월에는 로버트 레드포드 감독의 ‘흐르는 강물처럼’(1992), 잭 니콜슨의 연기가 일품인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1997)의 명장면과 명대사도 살펴보았다.

‘흐르는 강물처럼’의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오롯이 사랑할 수는 있다.” 나
We can love completely, without complete understanding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 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명대사이다.

이들 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형용할 수 없는 충만감이 든다.
마치 ‘아메리칸 뷰티’에서 릭키가 느꼈던 미어질 것 같은 마음 말이다.
이 순간이 바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가 아닐까.

김중기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