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 스페이스

만개의 빛(光) _ 공간과 생활문화

공간은 문화를 만든다

책으로 만든 작은 우주, 독립서점

지하의 기록실, 감성의 서가

‘아카이브 나인’

달서구 진천동 아파트 단지 사이 도로 모퉁이 건물의 지하 1층. 초록색 간판에 ‘Archive Nine’이라 적힌 글씨가 은은하게 빛난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무채색의 도시와 달리 알록달록한 문구와 따뜻한 나무 향이 어우러진 공간. 지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오롯이 나만의 취향과 생각을 마주할 수 있다. 서점, 아카이브 나인이다.

좋아하는 일을
‘기록’으로 남기다

“평생의 꿈 같은 일이었어요. 서점주인 말이에요.”
구민정 대표는 몸이 좋지 않아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오랫동안 품어온 꿈을 현실로 옮겼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을 해보자”라는 마음 하나로 시작한 공간이다. ‘아카이브(Archive)’는 기록보관소를 뜻한다. 구 대표는 이 단어처럼 이곳이 좋아하는 책과 문구를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보관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길 바랐다. 그리고 뒤에 붙은 ‘나인(Nine)’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다. 자신의 성 ‘구(具)’를 영어로 표현한 것으로, ‘구민정의 아카이브’, 즉 ‘나의 기록이자 누군가의 기록이 되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이름처럼 아카이브 나인은 대형서점이 아닌 진천동 골목의 작은 지하 공간에서 취향과 기록이 공존하는 서점을 완성해 냈다.

에세이와 문구,
일상에 스며드는 취향

아카이브 나인에 들어서면 따스한 조명 아래 놓인 수필과 시집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의 책 중 약 70%는 독립출판물이며, 그중에서도 에세이와 시의 비중이 높다. “누군가의 경험을 담은 글이 좋아요. 읽는 동안 나를 다독일 수 있거든요.”
모든 책은 대표가 직접 읽어본 뒤 선별한다. 책의 겉표지를 모두 벗겨둔 이유도 겉보다 내용으로 고르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서점 한켠에는 국내외 팬시와 수입 문구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일본 문구는 사이트를 뒤져가며 직접 고른다. 예쁜 펜, 손에 맞는 노트, 감성을 자극하는 엽서까지. 손님들은 그 작은 물건들을 만지며 자신만의 취향을 발견한다.

달서에서 피어나는
‘기록의 문화’

지하의 조용한 서점 한쪽 벽에는 흰색 메모지가 빼곡히 붙어 있다. 초등학생부터 어르신까지, 다녀간 손님들이 그림을 그리거나 짧은 글을 적어 남긴 흔적들이다. 글씨체도, 내용도 제각각이지만 그 안엔 이 공간을 향한 애정과 응원이 묻어난다. 그 사이에는 주인장의 다짐도 함께 걸려 있다.
“감성과 감각 한 꼬집을 넣어 저만의 공간을 만들어 갑니다. 저의 아카이브에서는 누구든, 언제든 잠시 쉬어가시면 됩니다.”
이곳은 단순히 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다. 방문객이 자유롭게 글을 남기고, 책을 대여하며, 문구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기록하는 공간이다. 구 대표는 여전히 매일 새벽 물류센터에서 일하며 오후엔 서점을 지킨다. 고된 일상 속에서도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 말한다.
최근에는 대구점자도서관과 협업해 독립출판물 전시를 기획하고, 지역 문구 작가들에게 매장 한켠을 내어 창작의 기회를 나누고 있다. 아카이브 나인은 그렇게 달서의 일상 속에서 ‘기록의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아카이브 나인

주소 : 대구 달서구 진천로16길 50, 지하 1층
시간 : 13:00~20:00 / 매주 월요일, 일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archive.nine9/

커피 향 사이로 번지는 시의 온기

‘수목원 산책’

대곡동 대구수목원 후문 근처. 커피 향이 골목을 따라 번진다. 작은 간판 아래 문을 열면 시집이 가득한 북카페 ‘수목원 산책’이 있다. 전직 국어교사이자 시인 ‘이아침’(본명 이영미) 대표가 운영하는 이곳은 시와 커피가 만나는 문학의 공간이다.

시를 닮은 이름,
걷듯이 머무는 공간

이영미 대표는 산책을 좋아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걷고, 인근 대구수목원은 오래된 친구 같은 장소다. 그래서 이름도 ‘수목원 산책’이라 지었다. “화초나 나무들 틈에서 마음이 고요해지는 것처럼, 시집들 사이에서 일상의 어수선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바랐어요.”
31년간 국어교사로 지내며 학생들에게 문학의 숨결을 전해온 그는 이제 자신이 사는 마을에 문학 살롱 같은 공간을 열었다. 여가 시간에 읽던 시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출발점이었다. 작품을 함께 읽거나, 혼자 곱씹으며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 그 고요함을 공유하고 싶었다.

한 잔의 커피,
한 권의 시집

‘수목원 산책’은 전국 14곳의 시집전문책방 ‘산아래 시’의 열 번째 자매점이다. 대형 출판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는 시인들의 작품을 알리고 싶다는 취지로 문을 열었다. “한 권의 시집도 누군가의 생애가 담긴 언어의 숲이에요. 그 숲을 함께 걷고 싶었죠.” 현재 600여 권의 시집이 진열되어 있으며, 손님이 원하면 시집의 정서나 주제에 따라 추천도 해준다. 시인들이 신간을 보내주기도 하고, 디카시(사진+시)나 필사를 즐기는 단골들도 생겼다. 메뉴판 또한 시로 가득하다.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아메리카노)’,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바닐라라떼)’, ‘백석의 여우난골족(카라멜라떼)’처럼, 모든 음료가 시인과 시의 제목을 따왔다. 커피를 주문하는 순간부터 시를 읽는 경험이 시작되는 셈이다. 수목원을 산책하듯, 이곳에서는 천천히 커피를 마시고 시 한 편을 음미하는 시간이 흐른다.

일상에 스며든
문학의 길

‘수목원 산책’은 카페이자 지역의 사랑방이다. 손주를 학교에 보내고 잠시 들러 시집을 읽는 이웃, 글을 쓰며 재능을 발견한 주민들. 이들은 모두 이 공간의 주인공이다. 테이크아웃을 주문한 손님에게는 시 구절이 적힌 컵 홀더를 건넨다. “커피 한 잔을 들고 가는 길에도 시가 함께했으면 해서요.” 일상 속 어느 순간에도 문학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한 작은 배려다.매주 화요일은 그림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드로잉이 열리고, 수요일은 팔공산에서 시의 언어를 탐구한다. 그리고 매월 열리는 북토크와 출판회, 시 낭독회는 ‘수목원 산책’이 지닌 문학적 향기를 한층 깊게 만든다.
이영미 대표는 “시를 읽고 쓰는 일은 마음을 정화하는 일”이라 말한다. “글을 쓰면 해소되듯, 시는 마음이 지쳤을 때 언어 속을 산책하는 느낌이에요.” 그의 말에는 시를 대하는 애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커피 한 잔으로 마음이 맑아지는 것처럼, 시 한 구절로도 고요가 찾아올 수 있다고 믿습니다.”
‘수목원 산책’은 오늘도 시의 향기와 커피 향으로 달서의 하루를 따뜻하게 채우고 있다.

수목원 산책

주소 : 대구 달서구 한실로6길 120-35, 1층 102호
시간 : 12:00~18:00 / 매주 수요일, 일요일 휴무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umok_m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