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캔버스
달서의 결(結) _ 기억과 전통
현대미술의 흐름과
여성 작가들의 부각
현대미술의 전면에서 활약 중인 여성 작가들
글_ 김영동 미술평론가

세계미술의 다원주의 시대를 맞아 이제 현대미술에서는 어떤 지배적인 트렌드(trend)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20세기 전반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운동이나 전후 미국 뉴욕 중심으로 전개된 추상표현주의 운동처럼 한때 서구 미술에서 주류를 형성했거나 국제적인 흐름을 이끌었던 사조들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대 예술에 와서는 특정한 조형 이념이 지난 시대와 같은 그런 정도의 지속적인 파급력을 가지고 재연될 일이 더 이상 없을 듯하다. 아직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제도가 성황리 운영되고 있고 영향력도 상당하기는 하다. 하지만 다양한 이슈들이 그때그때 제기되었다가 사라지곤 하지, 거기서 이전과 같은 현대미술의 트렌드를 형성할 만큼의 계기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지금은 오히려 미술계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조직이 국제적인 ‘아트 페어’들로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상업적 흥행에 대한 반향 때문일 것이다.
이제 어떤 특정한 표현 양식의 우세보다 개별 또는 그룹에 의해 이슈화되어 폭넓게 소통되는 예술적 주제들이 널리 관심을 받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인종이나 종교에 관한 혐오나 차별적 시각을 부정하고 서로 다름과 차이를 존중하자는 취지의 작품들을 최근 전시회에서 자주 본다. 특정 지역의 국경 봉쇄나 불법 이민자 문제를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바라보려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소수자와 주변인에 관한 관심, 왜곡된 사회적 통념의 반성적 성찰의 주제도 다양한 매체에서 취급된다. 기후 위기나 지구 환경, 인류세에 관한 주제도 물론 크게 부상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 여성 작가의 지위나 여성미술에 관한 언급이 괄목할 만큼 증가하는 것도 주목되는 한 특징이다.
이런 제반의 특징들은 사실 여성 작가의 부각과 동시에 주요 전시에서 공공연히 드러났다. 여성 작가들을 단순히 성별로 구분하는 자체가 정당할지 의문이지만 과거 기울어진 균형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평가를 바로잡으려는 노력과 실천은 현재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다. 독일의 한 공공 미술관은 여성 작가의 작품 구매를 위해 컬렉션 수집 예산의 절반 이상을 배당한다는 정책을 발표하고, 서울의 한 유명 사립미술관에서는 여성 작가 전시 비중을 50% 선으로 높이겠다고 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아마도 여성 작가가 더 많은 수의 전시회를 열고 작품 활동 양에 있어서도 훨씬 우세를 차지할 전망이다.

환경예술가 아그네스 데네스의 ‘대지 미술’,
아트 바젤이 개최되는 바젤시 메세플라츠 광장을 밀밭으로 바꾸어 놓은
2024년 ‘아트 바젤’의 밀밭 프로젝트 광경.
‘아트 바젤’에 초청된
여성 작가들의 작품 예
스위스 바젤시에서 매년 개최되는 세계적인 아트페어의 당국은 전시관이 있는 ‘메세플라츠’ 광장에 해마다 장소 특정적인 작품 설치로 대대적인 이벤트를 벌인다. 2024년에 환경미술가이자 개념미술가인, 아그네스 데네스(Agnes Denes)의 밀밭 프로젝트를 초대해 광장을 푸른 밀 이삭이 일렁이는 들판으로 바꾸어 놓았었다. 작가의 과거 대지예술 작품 사진을 대형 포스터로 소환하며 자연에 관한 향수를 자극하는 공공예술의 기능을 환기함으로써 아트페어의 순수성을 보완하는 효과가 컸다.
올해에는 독일 태생의 카타리나 그로스(Katharina Grosse)를 초청해 광장 전체를 에어 스프레이 건을 사용해 채색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아트페어의 방문객들이 광장을 오가는 동안 그림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 체험을 하게 되었다. 사방 자홍색 물감으로 뒤덮인 현실 공간 속에서 느끼게 되는 몰입감은 미술품의 상업적 거래를 추구하되 공익적 효과를 동시에 구현하려는 아트 바젤의 목표이기도 했다.

2025년 ‘아트 바젤’의 메세플라츠 광장은 카타리나 그로스의 페인팅 퍼포먼스로 다홍색 색채로 뒤덮었다.
Katharina Grosse, 합창CHOIR, 2025

‘언리미티드’ 전시에서 부각된 여성 조각가
후마 바바의 작품
2019년 ‘아트 바젤’의 특별전인 ‘언리미티드’ 전에 후마 바바(Huma Bhabha)의 거대한 조각상이 초대됐다. 4미터나 되는 키에 거칠고 기괴한 생김새의 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스와 숭고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새로움이 충격적이다. 작가는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 쿠로이나 이집트 파라오 상의 직립 자세에서 또한 자코메티의 조각상에서 발 부분이 참조된 듯하다. 게다가 장 뒤뷔페, 안젤름 키퍼 등 현대 작가들의 특징인 거침이 엿보인다.
사람의 형상을 닮은 듯한 이 거상의 주인공은 인류가 아닌 외계인이다. 두 다리로 서 있고 가슴과 복부가 구분되어 있으며 안면에 눈코입 등이 표시되어 있다. 얼굴은 사방으로 조각되어 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도 인종도 초월한 타자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이런 말을 건넨다. “우리는 평화 속에 왔다.”
흔히 공상과학영화에서 외계인의 출현은 으레 전쟁을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우정의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와 다른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적의와 경계를 보여왔던 데 반해, 우애와 환대를 표하면서 다가오는 낯선 타자가 주제이다. 이렇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움의 충격적인 작품을 만든 후마 바바는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 작가다.

Huma Bhabha, We Come In Peace, 2018·2019년 아트 바젤, Unlimited 展에 전시된 모습.
최근 주목받는
여성 작가들의 회고전들
2023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MMK)에서 독일 여성 작가 로즈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의 회고전이 펼쳐졌다. 미술사 속에서 또는 사회 현실에서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찾아 비판적으로 통찰한 작품들로 깊은 인상을 준 전시였다. 예를 들면 작품 <Replace Me>(2012)는 여성의 토르소를 그린 쿠르베의 작품, <세상의 기원>을 패러디했다. 원작의 복제 사진 위에다 거미 사진을 합성하여 여성의 몸에 대한 남성들의 관음적인 상상을 차단한다. 거미 이미지가 미국의 여성주의 화가 루이 부르주아의 주제인 것을 고려하면 표현의 의미가 중의적으로 더욱 확장한다.
로즈마리 트로겔의 작품들은 이미지와 제목의 텍스트가 상호작용하여 그림의 의미를 확대하는데 그런 점에서 개념주의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다. 제목들이 작품 이미지를 또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게 하고 반전과 역설을 통해 더 넓고 깊게 주제를 음미하게 한다. 1994년 작 <Sabine>에서는 제목이 니콜라 푸생과 루이 다비드의 <사빈느 여인의 약탈>이란 역사적인 그림들을 떠올리게 한다. 주방용품과 부엌 설비들 곁에서 해변 비치를 배경으로 어울릴 만한 포즈의 여성 누드가 초현실주의자들이 의외성을 자아내기 위해 즐겨 쓴 데페이즈망(전치) 기법을 떠올리게 하는데 분명 여성의 이미지를 상품화하는 시각과 관념에 도전하고 있다. 제목부터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해석>(2014)이란 작품에서도 작가는 남성중심주의나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작동하던 인습적 견해들의 폭력성을 암시했다.


Rosemarie Trockel, Sabine, 1994, Digital print on paper

Rosemarie Trockel, Misleading Interpretation, 2014

2024년에는 런던 출신으로서 1990년대 YBA(Young British Art) 작가로 출발해 사진, 조각, 매체 설치 작업으로 활동하는 사라 루카스(Sarah Lucas)의 회고전이 독일 만하임미술관에서 열렸다. 일찍부터 자화상 시리즈로 페미니스트적인 강력한 인상과 함께 젠더(gender) 문제와 관련한 메시지를 발표했다. 자화상에서처럼 작가는 흔히 성별을 상징하는 데 과일이나 식품 등의 재료를 풍자적으로 사용해 신랄한 농담조의 작품을 제작한다. 예를 들면 바나나를 먹는 자신의 초기 사진이나, 오이나 멜론 등으로 남녀의 성별을 요약하고 그들 간의 관계성을 연출한 작품 〈Au Naturel〉(1994)이 있다.
평소 인체를 스타킹이나 레깅스 따위의 유동적인 소재로 만들어 그와 대조되는 재료의 물성과 함께 배치하여 다양한 주제를 취급한다. 성적인 심리의 관계들을 노골적으로 다루면서 때로는 전복적인 주제의 작품들로 충격을 주는 급진적인 작가다. 대표적인 모티프인 ‘버니(Bunny)’ 시리즈를 참조하면 영락없는 남성의 일부분을 상징한 것이다. 때로는 여성의 가슴이나 남녀 성기의 상징적인 표현에서 과감성을 보이면서 프로이트적인 정신 심리적인 문제를 파고든다.
이렇듯 지금 세계 굴지의 미술관들은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 작가들을 편견 없이 초대하고 소개하는 데 적극적이며 과거 역사 속에 저평가된 여성 작가들을 연구하고 재조명하는 일에 사명을 다하고 있다.

Sarah Lucas, Self-Portrait with Fried Eggs, 1996, C-print, 151 x 103 cm

Sarah Lucas, Basel 2019, Champagne Maradona, 2015, Bronze,
445 x 200 x 340 cm

Sarah Lucas, Margot, Plaster, cigarette, freezer 116 x 202 x 87 c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