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룸
달서의 결(結) _ 기억과 전통
시대를 노래한 사람
『음악가 박태준을 기억하다』
작곡가 박태준(朴泰俊, 1900~1986)은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가곡, 동요, 합창, 교회음악을 아우른 예술가로, ‘노래하는 민족의 정신’을 지켜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노래에 머물지 않고, 시대의 상흔과 정서를 증언하는 ‘음악적 일기’ 였다. 2024년, 대구 달서구 월곡로가 ‘박태준 길’로 명예도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은, 그의 음악적 발자취가 도시 공간 속에서 재현된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이 글은 박태준의 생애와 음악 세계를 조명하고, 대표작을 분석하며, ‘박태준 길’의 조성 배경과 함께 도시가 예술가를 기억하는 방식을 되짚어 보는 기록이자 성찰이다.
글_ 김완준 성악가
현 작곡가 박태준 기념사업회 회장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성악과 특임교수전 대구오페라하우스, 계명아트센터 관장 역임

박태준은 1901년 1월 12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동(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 157번지)에서 태어났다. 근대적 교육제도가 도입되던 격동의 시기, 어린 박태준은 작은 마을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음악적 감각을 키웠다. 박태준은 기독교 교단에서 운영하는 대구 계성 중학, 평양 숭실전문학교(1921)를 졸업하고, 경남 마산 창신학교, 대구 계성 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동요 <오빠 생각>, <맴맴>, 가곡 <동무 생각>(일명 <사우(思友)>) 등을 지었고, 1929년에 동요곡집 <중중 때때중>, 1931년에 동요곡집 <양양 범벅궁>을 발간하였다. 그는 악보에 갇히지 않은 소리의 생명과, 노래가 전하는 정서적 힘을 일찍이 이해하며 성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의 음악 철학과 정서적 섬세함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박태준은 1932년 미국에 건너가 더스커럼 대학과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에서 합창 지휘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해외 유학은 단순한 학업이 아니라, 그의 음악 세계를 폭넓게 확장하는 계기였다. 그는 합창과 교회음악, 서양 음악 이론을 깊이 있게 습득했으며, 동시에 한국적 정서를 담은 음악을 만들어야 한다는 결심을 굳혔다. 귀국 후 1936년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후에 경성여의전 교수를 거쳐 1948년 연세대로 옮겨와 1974년까지 26년간 교수로 있었다.
특히 대구사범학교와 계성학교에서의 교육 활동은 ‘대구 음악문화의 뿌리’로 평가받는다. 그는 학생들의 눈빛과 손끝 하나하나에 음악적 꿈과 정서를 심으며, 후학 양성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박태준에게 음악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이 아니라, 삶과 정서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는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닦는 수양의 길이다”라고 말하며, 일제강점기 언어 말살 정책 속에서도 우리말 노래를 지켜내고자 했다. 그의 선율에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정신의 독립운동’이 스며 있었고, 이는 단순한 교육적 신념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시대적 책임을 담은 표현이었다. 기술적 완성보다 진실함, 화려함보다 정직한 선율을 추구했던 그는, 제자들에게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말고, 진실하게 부르라”라고 조언하며 마음을 담은 음악의 힘을 강조했다.이러한 그의 음악관은 한국 근대 가곡의 태동기와도 맞닿아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 최초의 가곡은 홍난파의 <봉선화>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태준의 <동무 생각>(사우, 1922)이 더 이른 시기에 작곡된 ‘최초의 가곡’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봉선화>는 본래 1920년 홍난파가 작곡한 기악곡 ‘애수’에 1926년 김형준이 가사를 붙이면서 가곡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반면 <동무 생각>은 1922년 이미 시와 음악이 함께 창작된 노래로, 서양식 가곡 형식을 완전하게 갖춘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구광역시를 비롯한 여러 기관에서는 <동무 생각>을 “대한민국 최초의 가곡”으로 명명하고 기념사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관련 학술 논의와 지역 음악계의 재조명도 활발하다.
1922년 무렵 작곡된 ‘동무 생각’은 단순한 동요를 넘어 예술가곡의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계절감과 정감, 기억과 그리움이 교차하는 정서적 깊이를 보여준다. 시인 노산 이은상이 가사를 붙인 이 곡은 특히 대구 청라언덕이라는 공간적 기억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청라언덕은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였던 과거의 모습과 계성학교와 인접해 박태준이 통학하던 길목이라는 기억을 품고 있다. 이 언덕을 오르내리며 그는 신명여학교 소녀를 몰래 바라보았고, 그 마음속 설렘과 내성적 그리움이 ‘백합 같은 내 동무야’라는 가사로 남았다. ‘동무 생각’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절 구조로 되어 있으며, 반복과 후렴을 통해 선율이 자연스럽게 귀에 익도록 설계되었다. 절제된 반주는 청자에게 여백을 남기며 상상을 자극한다. 단순한 사랑 노래를 넘어, 기억과 시간이 음악으로 변환된 예술적 기록으로, 오늘날에도 ‘대구의 노래’로 세대를 넘어 사랑받는다. 청라언덕의 공간적 기억이 음악 속에 살아 숨 쉬는 이 작품은, 개인적 감정과 도시적 공간이 만나는 음악적 증거이기도 하다. 1925년 발표된 ‘오빠 생각’은 어린이 화자가 서울로 간 오빠를 기다리는 마음을 담아, 시간의 흐름과 정서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박태준은 6/8 혹은 8/6 박자 유사 리듬을 활용하여 멜로디에 부드러운 하강성을 부여함으로써, 어린 화자의 슬픔과 기다림을 극적으로 강조했다. 단순한 반주 속 화성과 음계적 움직임은 가사의 정서를 배가시키며, 동요라는 장르적 한계를 넘어 긴 여운을 남긴다.

이는 박태준이 추구한 ‘단순함 속 진실함’의 음악 철학이 어린이 노래 속에서도 구현된 사례다. 또한,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에게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민족적 감성을 일깨우는 정신적 노래운동의 목적으로 평가된다.
박태준은 작곡가이자 교육자로서, 음악 교사로 후학을 양성하고 교회음악을 통해 공동체 정서를 하나로 묶는 데에도 힘썼다. 그의 대표 성가곡 <부활>(1935), <평안>(1935), <귀한 주의 사랑>(1949), <인생을 건지신 주>(1967), <주와 함께 살리라>(1967) 등은 단순히 음악적 성취를 넘어, 공동체와 신앙, 사회적 위로를 연결하는 작품이었다. 그의 삶은 겸손과 절제, 음악과 교육의 진실함을 우선시하는 태도로 이어졌다. 특히 대구에서의 활동은 지역 음악문화의 뿌리가 되었고, 제자들은 훗날 전국 음악계의 중추로 성장하였다.
2024년 10월, 대구 달서구는 월광 수변공원 입구에서 월곡네거리까지 1.2km 구간의 월곡로를 ‘박태준 길’로 명예도로 지정했다. 길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으며, ‘음악으로 기억되는 도시’를 표방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명예도로 제도는 실제 주소 변경이 없는 상징적 지정이지만, 지역 정체성과 예술가의 기억을 연결하는 문화적 실천으로 의미가 깊다. 달서구의 협력과 노력은 단순한 명명 행위가 아니라, 도시가 예술가를 기억하는 방식이며, 그가 걸었던 길이 시민들의 발걸음 속에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박태준은 한국 근대음악사에서 단순히 한 세대의 작곡가로 머무르지 않았다. 그는 동요, 가곡, 합창, 교회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한국 음악의 근본적 기반을 다진 인물이었다. 그의 음악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하고 서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시대의 아픔과 민족의 정서, 그리고 예술가가 지녀야 할 책임감이 깊이 배어 있다. 동시에 그는 음악 교육자로서, 한국 음악이 사회 속에서 뿌리내리도록 하는 데 헌신했다. 그의 삶과 예술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도, 그는 “음악은 시대의 거울이 될 수 있다.”라는 사실을 몸소 증명한 인물이었다. 나라가 식민지의 고통과 혼란을 겪던 때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하고자 했다. ‘오빠 생각’과 같은 동요, 그리고 ‘동무 생각’과 같은 가곡은 단지 아름다운 선율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감정과 기억을 담은 역사의 언어였다. 또한 박태준의 예술세계는 전통과 수용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음악적 모색의 과정이었다. 그는 서양의 음악 형식을 받아들이면서도 한국적 언어와 정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의 음악은 때로는 모호하게, 때로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모색은 단순한 음악적 실험이 아니라, 한 예술가가 시대와 정체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었다.
박태준의 후반 생애는 개인 창작보다 교육과 제도 구축, 그리고 후진 양성에 집중되었다. 그는 예술가가 작품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예술이 지속할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연세대학교 음악대학의 조직과 종교음악과 개설, 음악협회 운영 등은 그러한 사명감의 산물이었다. 박태준에게 예술은 개인의 영감이 아니라, 사회와 공존하며 후대를 길러내는 공동체적 실천이었다. 그는 예술이 단순히 ‘현재의 감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남긴 셈이다.
결국, 박태준의 삶과 음악은 단순히 한 인물의 전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국 근대 문화사의 한 축이며, 노래와 정서를 통해 민족의 혼과 예술의 가치가 만나는 지점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그의 음악이 오늘날까지도 연주되고, 그의 이름이 고향의 길 위에 남아 있다는 사실은, 그가 남긴 예술적 정신이 여전히 우리 안에서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한, 박태준의 정신 또한 시대를 넘어 우리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2011년 설립된 박태준 기념사업회는 그의 음악과 삶을 기억하고 계승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이어왔다. 박태준 기념사업회는 설립 초기부터 그의 음악과 예술적 업적을 연구하고 보존하며,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업과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이러한 활동은 단순히 작품을 보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박태준의 정신과 음악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 숨 쉴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집중되었다. 특히 박태준 기념사업회는 달서구와 긴밀한 협업을 이어가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문화 행사를 실현하였다. 그 결과, ‘박태준 길’은 단순한 명예도로를 넘어, 시민들에게 음악과 기억의 따뜻한 울림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달서구와의 협업은 작곡가 박태준 기념사업회를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길의 지정과 흉상 설치, 음악 프로그램 운영 등에서 보여준 달서구의 이해와 지원은, 지역 사회가 예술가의 가치를 함께 존중하고 계승하는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협력 덕분에 시민들은 박태준의 음악을 단순히 듣는 데 그치지 않고, 그가 걸었던 길 위에서 그의 삶과 시대적 의미를 직접 체험하고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귀한 성과를 가능하게 한 달서구의 협조와 이해에 깊은 감사를 전하며, 앞으로도 박태준의 음악과 정신이 도시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지속해서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기대한다. 박태준의 음악은 단순히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시간적 다리 역할을 한다. 박태준 기념사업회는 이러한 가치를 시민들에게 전달하고, 후대에 계승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노력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박태준의 음악과 정신이 우리 곁에서 지속해서 살아 있는 이유는 단순히 작품의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삶 전체가 교육자이자 예술가로서의 헌신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정신이 기념사업회와 달서구의 협업을 통해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곳마다 시민들은 시대를 넘어선 따뜻한 위로와 감동을 경험하고, 그의 정신은 우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억이 된다. 앞으로도 박태준의 음악과 삶은 우리 도시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끝없이 재생되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대에게 감동과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