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의 손

달서의 결(結) _ 기억과 전통

한 사람의 시간, 한 마을의 기억

한 사람의 시간,
한 마을의 기억

故 혜산 조경제 선생의
‘혜산관’과 ‘흥생한의원 기념관’

달서구 감삼동, ‘성서 조약국’으로 불리며 평생을 이웃의 아픔을 돌본 고(故) 혜산 조경제 선생. 그의 손길이 담긴 물건 하나하나가 모여 세워진 혜산관과 흥생한의원 기념관은 이제 가족의 추억을 넘어 지역의 역사를 품은 문화의 씨앗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故 혜산 조경제 선생의 ‘혜산관’과 ‘흥생한의원 기념관’

야학 선생에서 ‘성서 조약국’까지

조경제 선생은 초등학교를 중퇴한 뒤 스스로 글을 깨쳤다. 16세에 야학을 열어 문맹 퇴치에 힘썼고, 2년여 만에 마을 문맹을 없애 ‘야학 선생’으로 불렸다. 세 아들을 잃은 아픔은 그를 한의학으로 이끌었고, 어려운 이웃의 병을 돌보며 ‘성서 조약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당시 감삼동은 ‘성서’라 불렸고, 약국이나 병원이 드물던 시절이었다. “성서에 조 씨가 하는 약국이 있다”라는 소문이 퍼지며 그가 연 ‘흥생한의원’은 자연스레 ‘성서 조약국’으로 불리게 되었다. 돈이 없어도 누구나 치료받을 수 있었던 그의 인술은 전국으로 알려졌고, 사람들은 그를 ‘명의 조경제’라 불렀다.
그의 손길은 약방을 넘어 마을 전체로 뻗었다. 4대째 감삼동에서 살아온 그는 낙후된 마을에 전기를 가설하고, 본리초등학교 통학로를 확장했으며, 감삼파출소와 성서2동 동사무소 부지를 희사했다. 환갑에는 잔치 대신 한강이남 최대 규모의 경로당 ‘수림원’을 지어 동네 어르신들께 기증했다. 또 수림장학회를 설립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했고, 그의 자녀들은 지금도 매년 그의 생일에 장학금 전달식을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 인술은 곧 사람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일이었다.

혜산관 및 흥생한의원 기념관

혜산관 및 흥생한의원 기념관
• 달서구 감삼북길 111, 감삼북길 109
• 053-551-2005(전화로 예약 후 방문)

한 사람의 삶, 문화로 피어나다

1994년 조경제 선생은 평생 살던 감삼동 집터에 ‘혜산관’을 세웠다. 행사장에서 받은 코르사주, 양철 도시락, 성냥통, 벼루와 자전거, 벼락 맞은 대추나무로 만든 소 여물통까지, 그의 손끝을 거친 물건들은 모두 삶의 온기가 남은 기록이었다. 1만 5천여 점의 전시품은 한 사람의 인생이 곧 전시가 된 삶의 기록관이자 생활사 박물관이었다.
혜산관의 전시물들은 한 가족의 일상에서 출발해, 한 세대의 시간으로 확장된다.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 8남매의 도시락통이 있고 한편에는 재봉틀과 농기구, 낡은 화폐가 그 시대의 생활을 증언한다. 공중전화와 측음기, 도자기와 초기 휴대전화가 나란히 놓인 풍경에서는 산업화와 기술 변화의 발자취가 겹쳐 보인다. 그 안에는 가족의 기억이 있고, 마을의 시간이 있다. 세월을 함께한 물건 하나하나는 근대 달서의 생활상과 지역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귀한 기록이며, 그가 남긴 일기 수십 권은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도 조용한 삶의 지표가 된다.
그의 세월은 시간 속에 멈추지 않았다. 2012년 12월 24일 타계 후, 생전 진료하던 ‘흥생한의원’은 10년 뒤 같은 날 ‘흥생한의원 기념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2012년 12월 달력에서 멈춘 진료실, 은은한 약재 향이 남은 접수실, “이 길이 내 길”이라 새겨진 문구 아래 자리한 그의 흉상… 모든 것이 그날의 온도를 그대로 품고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감사장과 표창장, 감사 편지, 낡은 진료 가방과 자전거, 연주하던 악기까지 그가 남긴 시간은 여전히 감삼동의 공기 속에 살아 있다.
혜산관과 흥생한의원 기념관은 단순한 추억의 공간이 아니다. 한 사람이 남긴 물건과 기록이 한 지역의 생활사가 되고, 그의 나눔이 마을의 문화 전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의 삶이 지역의 역사가 되고, 문화의 씨앗이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