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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노인의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서
글. 선배시민 저자, PH마중물미디어 유해숙 대표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우리 보고 노인(No人)이래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2008년 인천의 한 노인문화센터에서 강의 중에 들었던 내용이다. 충격적이었다. 나도 곧 노인이 될 터인데 No人이라니 말문이 막혔다. 그 때부터 노인에 대한 새로운 이름을 찾기 위한 탐구를 시작했다.
노인은 육체와 정신이 쇠퇴한 사람으로 분리이론(disengagement theory)으로 설명된다. 이 이론은 노인이 되면 사회적, 신체적, 심리적인 측면에서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노인을 분리이론에서 이해하면 노인은 신체와 심리, 사회로부터 분리된 늙은이로서 돌봄의 대상이 된다. 늙음은 자연스럽게 사회로부터 퇴각하는 단계이고, 이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분리이론은 사회로부터의 퇴각하는 것이 노년의 운명 같은 것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활동적인 액티브 시니어의 출현
그런데 새로운 노인이 나타났다. Active Senior! 액티브 시니어는 인생 이모작을 꿈꾸는 노인으로 보통 경제력이 있고 학력과 능력이 있는 존재이다. 성공한 노년(successful aging), 생산적 노화(productive aging) 등으로 개념화된다. 액티브 시니어는 자기계발, 자기관리, 건강관리를 특징으로 한다. 은퇴 후 활력이 넘치는 바쁜 노인들이다. 베이비부머들이 노인 인구에 편입되면 액티브 시니어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955년부터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될 즈음인 1963년까지 출생한 이들은 전체 인구 중 14% 남짓으로 700만 명을 넘어선다. 대학을 나오고, 민주화를 경험했고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기존의 노인 이미지와 달리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액티브 시니어는 노인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문제는 여기에 속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의 특정 노인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학력, 경력, 경제력 등 사회적 · 경제적 자산이 어느 정도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노인은 문제의 원인을 구조보다는 개인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성공의 요인을 근면, 자립, 자조의 맥락에서 이해한다. No人의 불행은 그의 탓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개인주의자, 더 나아가 이기주의자일 수도 있다. 즉 자신의 여가, 취미, 자기계발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공동체의 문제나 타인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보면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
No人일까, Active Senior일까? 필자는 노인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둘 중의 하나의 인간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렇다고 노인을 어르신 취급하지 않아야 한다. 어르신은 ‘Know人,’ 즉 모든 것을 알고 경험이 있는 존재로 묘사된다. 어르신은 금욕, 양보, 지혜 등 미덕을 가진 존재이다. 어르신으로서 노인은 행복할까? 현자이고 신비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이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금욕, 양보, 어른인 척, 젠 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잇값을 하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다. 필자는 노인이 No人, Active Senior, Know人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비판한다. 노인도 보통 사람처럼 자신만의 경험, 역사, 개성, 경제력, 생각, 관계 등이 있는 복합적인 존재이다. 노인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늙음이다. ‘생물의 숙명으로서 노화가 초역사적인 현실이기는 하나, 그래도 그 운명은 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체험된다’라는 보부아르의 언급처럼 사회와 정치에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즉 어떤 계급, 권력관계, 정치, 국가에 사느냐에 따라 상이한 삶을 살아간다.
진정한 시민권의 주체 선배시민
필자는 시민권의 관점에서 노인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한다. ‘노인은 나이든 시민, 즉 선배시민이다!’ 선배시민은 공동체의 일원인 시민이며 후배와 함께하는 시민선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연령, 의무, 권리와 연관된 개념이다. 선배시민은 자신과 이웃을 넘어서서 국가공동체에 관심을 갖고 선배의 지혜와 책임을 다하려는 시민을 의미한다. 이것은 돌봄의 대상인 늙은이와 자신만을 돌보는 성공한 노인, 공동체에 대해 훈수만 두는 어르신과 달리 공동체를 돌보는 주체이면서 변화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어르신은 존경의 대상이지만 사회와 정치로부터 초월해 있는 현자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선배시민은 시민성을 갖고 시민권을 요구하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후배시민과 함께 소통하고 학습하고 연대하는 존재이다. 어르신과는 달리 선배시민과 후배시민의 관계는 수평적이다.
늙은이는 수동적이고 돌봄의 대상이다. 빈곤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배고픔과 추위를 해결하기 위해 민원인이 된다. 모든 책임은 개인에 있으며 국가나 사회에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선배시민은 헌법 34조 1항에 명시된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고 사회권(복지권)을 권리로서 요구한다. 이들은 시민권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를 돌보는 주체이다.
선배시민과 유사해서 가끔 혼동되는 개념이 액티브 시니어 혹은 성공한 노인이다. 활동적이고 참여적이라는 측면에서 양자는 비슷해 보인다. 하지만 인식과 행동에서 차이가 존재한다. 액티브 시니어가 성공적 노화나 생산적 노화가 개인적인 삶을 기반으로 인식한다면 선배시민은 개인을 넘어서서 시민권의 실현이라는 측면, 즉 정책과 구조적 요인에 주목한다. 또 액티브 시니어가 개인의 노력과 실패한 개인에 대한 자선적 실천을 한다면 선배시민은 사회권의 결핍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책임과 역할을 따져 묻는다. 선배시민은 나를 관계와 공동체 속에서 묻고, 시민권의 관점에서 더 나은 공동체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노인이 선배와 시민으로서 생각하고 실천할 때 그는 권위와 품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선배시민은 늘 학습하고, 토론하고, 실천하는 시민이며, 후배들을 대변하고, 이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시민선배이다.
선배시민과 후배시민이 함께 공동체 돌봐야
선배시민은 이상이 아니다. 이상이 일상이 되도록 상상하고 실천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사단법인 마중물은 ‘선배시민지원센터’를 두고 선배시민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노인복지관 등 수많은 현장과 함께 선배시민을 교육하였다. 한국노인복지관협회는 2015년부터 선배시민대학을 운영하고 2018년부터는 보건복지부 프로젝트로 선배시민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2020년부터는 지역별 선배시민총회와 전국 단위 선배시민 정책대회를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선배시민의 담론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체계화하기 위해 선배시민학회가 창립되었다. 선배시민학회는 제주도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북 콘서트를 진행하고, 선배시민과 후배시민이 함께하는 포럼을 개최하면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선배시민의 희망의 근거는 ‘선배시민’이 되신 분들이다. ‘선배시민이 되고 나니 귀가 달라지고 눈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더라’라고 고백하면서 후배시민과 공동체를 돌보는 분들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노인복지관에서 자신의 건강을 돌보던 분들은 후배시민의 건강도 돌보고, 마을의 사회체육시설을 돌보고, 코로나19 시기에 공동체를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등 후배시민과 공동체를 돌보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새로운 노인상은 노인복지관이 돌봄에 치중하는 서비스센터에서 선배시민과 후배시민이 함께 학습과 토론하는 지역공동체의 거점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노인의 새로운 정체성, 선배시민은 시민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당당하게 살아가기 위한 기반이리라. 또한 시민이 생존을 넘어서 문화예술까지 향유하는 실존적 존재로서 살아가기 위한 동력이리라. 선배시민의 힘찬 선언이 끌어올리는 희망의 근거가 기대된다.
우리는 무기력한 늙은이도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개인주의자도 아니다.
우리는 선배시민이 되기 위해 늘 함께 생각하고, 질문하고, 상상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돌봄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후배시민과 공동체를 돌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배시민이 걸어가면 그것은 곧 공동체의 새로운 길이 될 것이다.
(선배시민 선언문 중)
선배시민 저자,
PH마중물미디어 유해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