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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상화(尙火)와 빙허(憑虛), 21세기에 다시 만나다

상화와 빙허는 일제강점기를 치열하게 살다 간 대구 출신의 문학인이자, 독립운동가다.

1948년 달성공원에 세워진 국내최초의 시비 상화시비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 전경

사실주의 문학 선구자 빙허(憑虛)
빙허 현진건은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시절 「빈처(貧妻)」,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고향」 등의 단편소설을 발표해 리얼리즘 문학의 선구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 현진건은 작가로서의 작품성 외에도 동아일보 사회부장 시절이었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우승을 차지한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은 사건(일장기 말소 사건)을 주도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현진건은 1년간 옥고를 치르고 동아일보를 사직해야만 했다. 그 후 글을 쓰면서 양계로 호구를 이어간 그는 잠시 동아일보에 복직하기도 했지만 가세는 빈한했다. 원고료와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미두(쌀의 시세를 이용해 현물 없이 쌀을 사고파는 투기 행위)에 투자했다가 실패해 양계장과 집을 처분해야만 했다. 집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 제기동의 조그만 집으로 이사해 그 곳에서 말년을 보내다 1943년 4월 25일 지병이었던 폐결핵과 장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경상의 불꽃 상화(尙火)
상화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의 침실로」, 「말세의 희탄」 등의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비판한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는 교과서에 실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시다. 이상화는 빼어난 시인이기 전에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기도 했다. 1919년 대구에서 친구인 백기만 등과 3 · 1운동을 모의하다가 발각돼 도피생활을 해야만 했고, 1927년 의열단 사건, 1928년 독립자금마련을 위한 ‘ㄱ당사건’ 등으로 구금되기도 했다. 또 1936년 만주에서 독립군 활동을 하고 있는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등을 논의하고 돌아오던 길에 일경에 체포돼 구금됐다. 얼마 후 가석방으로 풀려나온 후 교남학교(대륜고 전신)에서 조선어와 영어, 작문 등을 가르쳤고, 권투부를 창설해 지도하기도 했다. 이상화는 “약소민족은 주먹이라도 잘 써야 된다”며 학교 체육대회 종목에 권투를 넣었다고 한다. 1940년 말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주로 생활하며 독서와 연구, 번역 등에 몰두했다. 1943년 3월 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4월 25일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서로가 받지 못한 부고(訃告)
현진건의 부고는 대구 서성로에 있는 이상화 집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부고가 당도했을 때 자택에는 빈소가 차려져 있었다. 그날 아침 상화는 위암과 폐결핵의 합병증으로 이미 생을 마감한 뒤였다. 어릴 때부터 친한 벗이었던 두 문인은 그렇게 서로의 부고를 받지 못한 채 같은 날 마흔을 갓 넘긴 짧은 삶을 마감했다. 빙허가 42세(만), 상화가 42세(만) 생일(음력)을 2주일 남짓 앞둔 4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살아서 서로를 응원하고 의지했던 친한 벗은 그렇게 어깨동무하듯 한날 생을 마감했다. 그 덕에 서로는 물론, 가족들조차 서로의 문상을 하지 못하게 됐다. 빙허는 후사로 아들 없이 고명딸만 뒀고, 고명딸 현화수는 두 달 전에 문우였던 월탄 박종화의 외아들과 결혼했다. 빙허의 시신은 화장해 지금의 서초동에 유해를 안장했다. 그 후 1970년대 강남개발로 이장해야 할 처지가 되자 사돈인 박종화가 유해를 한강에 뿌렸다고 한다. 상화는 후사로 아들 셋을 뒀으며, 현재 대구시 달서구 대곡역 인근에 있는 선영에 가족들과 함께 안장돼 있다.

2022년 4월 24일 상화기념관 · 이장가 문화관에서 거행된 79주기 합동추념식

개벽백조 통해 각각 문단에 이름 올려
1917년 현진건, 이상화, 백기만 등은 대구에서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했다. 거화는 본격적인 동인지라고 하기 보다는 작문지 수준에 가까웠다. 현진건은 1920년 문예지 『개벽(開闢)』에 「희생화(犧牲花)」를 발표하면서 처음으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당시 약관의 나이에 이미 ‘빙허’라는 아호를 쓰고 있었다. 빙허는 ‘허공에 의지한다’는 의미로, 중국 송(宋)나라의 문인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 가운데 ‘넓기도 하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타고서(浩浩乎! 憑虛御風而)’란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이상화는 1922년 1월 『백조』 창간호에 「말세의 희탄」, 「나의 침실로」 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백조』, 『개벽』, 『문예운동』, 『삼천리』, 『별건곤』 등 잡지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대구 행진곡」, 「서러운 해조」 등 6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있는 현진건 문학비

사후에 독립훈장 등 추서해 정신 기려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주요한 등 동시대 이름난 작가들이 친일 이력에서 자유롭지 못하지만 빙허와 상화는 친일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 주변의 문인들이 친일에 부역할 때 오히려 붓을 더 꼿꼿하게 세우고 항일을 주창했고, 절필할지언정 일제를 찬양한 일은 결코 없었다. 이들이 항일한 것은 가계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현진건의 셋째 형 현정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돼 반년 만에 옥사했다. 그러자 형수도 형을 따라 자살했다. 1932년의 일이다. 이상화의 형 이상정은 1920년대부터 독립군에 투신해 광복의 날까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한 독립군장군이었다. 동생 이상백도 일제강점기 말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해 독립운동을 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진건과 이상화 사후에 이들의 독립운동정신을 기리고자 독립훈장을 추서했다. 현진건은 2005년 8월 15일에 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됐고, 이상화는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각각 추서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詩碑와 기념비들
1948년 3월 14일 달성공원에 대한민국 최초의 시비(詩碑) ‘상화시비(尙火詩碑)’가 세워졌다. 김소운, 이윤수, 구상 등 시인들이 중심이 돼 건립했으며, 시비에는 막내아들 이태희의 글씨로 시 「나의 침실로」 일부가 새겨져 있다. 두류공원 인물동산에는 현진건의 문학비를 비롯해, 이상화의 시비, 백기만, 이장희 등 친구들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또 수성못 상화동산에는 상화와 그의 친구들로 현진건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현재 이상화의 시비는 달성공원(「나의 침실로」 일부)을 비롯해 수성못 상화동산과 중구 이상화 고택, 달서구 두류공원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달서구 대곡역에서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 가는 길에 「나의 침실로(전문)」 등 대구에만 5개가 세워져 있다.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 관계자는 “후손들 입장에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만 주로 알려지기에 「나의 침실로」 시비를 지난해 새로 세웠다”며, “달성공원에는 시 내용 일부가 새겨져 있지만 이곳에는이장가문화관에는 상화는 물론 형 이상정 장군, 동생 이상전문이 다 담겨 있다”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사후 78년 만에 재회한 빙허와 상화
2021년 4월 25일 오후 5시, 대구시 중구 서문로에 있는 카페 라일락뜨락에서 이상화 · 현진건 선생 78주기 합동추념식이 거행됐다. 라일락뜨락은 이상화가 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생가로, 현재는 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추념식은 헌차와 묵념으로 시작됐고, 이어 이상화의 시 「독백」과 「말세의 희탄」, 현진건의 소설 「고향」을 낭송해 두 문인의 문향(文香)으로 카페마당을 가득 채웠다. 곧이어 노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울려 퍼졌다. 1976년 음악교사였던 작곡가 변규백은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들었다. 그 후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음반으로 취입해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음반을 취입할 당시 정확한 가사 전달을 위해 많은 부분을 얼마 전 작고한 김민기의 낭독으로 처리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민중가요로 대학생들 사이에 널리 불리어졌고, 현재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올해 이상화 · 현진건 선생 79주기 합동추념식은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대구 달서구 명천로 43)에서 4월 24일 오후 5~7시까지 2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대구를 연구하는 독서모임 구구단(究丘團 · 의백 이원호), 대구역사탐방단(공동대표 강성덕 · 오규찬), 참작가 현진건현창회가 주최했다. 이날 추념식에는 이현우 경주이씨 화수회 총회장 등 종친을 비롯해 시민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차, 묵념 등에 이어 상화오케스트라의 대구행진곡, 광복군가 축하공연, 시낭송, 특별 강연 순으로 진행됐다.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은 2017년 경주 이씨 이장가(李庄家) 후손들이 사비를 들여 선영 인근에 개관했다. 이장가는 상화의 조부인 이동진 선생이 재산을 가족 및 친지에게 나누어준 일을 ‘이장’이라 불러 붙여진 가문이름이다. 상화기념관 · 이장가문화관에는 상화는 물론 형 이상정 장군, 동생 이상백 전 IOC위원, 이상오 저술가 등 4형제와 이장가의 유물(책, 편지, 사진, 그림 등) 300여 점이 전시돼 있어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이장가 사람들의 민족 계몽운동 및 항일 독립운동의 업적을 살펴볼 수 있다. 해마다 합동추념식은 이 곳에서 진행될 예정이다.